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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불완전 하다

기억은 변하기 쉽고 조정되기 쉽고 이리저리 바뀌기 쉽다.스스로를 속이기는 어렵지 않다.여러분이 스스로를 속일 수 있다면, 남도 여러분을 속일 수 있다.남이 여러분을 속여서 기억과 지각을 의심하게 할 수 있다.이것의 가장 생생한 예가 바로 '가스 라이팅'이다.가스라이팅은 일종의 심리적 조작으로 유명한 영국 서스펜스 영화<가스등>에서 이름을 따왔다.영화에서 남편은 아내가 보고 지각한 내용을 반복적으로 부정함으로써 아내가 미쳐가고 있다고 설득하려 한다.그래서 아내는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기 시작한다.자기가 보았다고 여기는 내용과 자기가 보았다고 남편이 말해주는 내용 사이의 모순을 해소하려고,결국 자신이 분명 미쳐가고 있음을 인정한다.우리가 아는 모든 것, 우리가 이름 부르는 모든 것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우리 기억의 산물이다.따라서 우리는 기억을 믿어야 하며, 그러지 않았다가는 모든 것이 붕괴된다.사고와 개념이 서로 긴밀히 관련되어 있는 내용에 대한 기억이라 조밀하게 연결된뉴런 네트워크를 통해 활성화되는 바람에 틀리거나 오류가 생기더라도,과거를 반영하지 않는 활성화의 상태에 우리가 반응한다기보다는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기억한다고 가정하는 편이 완벽하게 합리적이다.우리가 무언가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기억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믿는 경향이 있다.만약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아예 기억에 없었으리라고 가정한다.우리는 기억을 어떤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증거로 취급한다.

지각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다.

[감각은 얼마나 믿을 만한가]우리는 시각, 축각, 청각 등의 감각계를 통해 세계를 인식한다.......,선생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교실이 어떻게 생겼는지 교실에 있을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는 조금 기억난다.이것은 감각기억이다.지금 말해놓고 보니 이 기억은 비록 구체적이긴 하지만 진짜가 아닐 수 있다.|96|자신의 감각을 믿어야 하는가?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말은 옳은가?내가 보기에는, 많은 경우에 그 반대 즉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가 실제로 더 정확하다.......,착시 현상들이 우리가 세계를 지각하고 이해하는 방식의 일례라는 점을 설명하겠다.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지 않으며, 우리가 보는 것은우리 앞에 있는 대상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과 결합해 재구성한 결과물이다.|99|[착각에 관한 연구]착각(illusion)이란 단어는 라틴어에서 비롯해 중세 영어로 이어졌는데, 그 어원은 '속이다'라는 뜻이다.우리는 대체로 착각은 속임수나 기만이라고 여긴다.마술사는 관중을 속여서 실제로 관중 앞에 있는 것과 다른 무언가를 본다고 여기게끔 만드는 공연자다.마찬가지로 우리는 종종 감각적 착각이란 감각계가 우리를 속이려는 시도라고 여긴다.더 적절한 설명을 하자면, 착각이란 감각 입력을 활성화시키는 부분과뇌의 나머지 부분이 감각 입력을 해석하는 방식 사이의의사소통 단절 때문에 생기는 속임수 현상이다.......,따라서 착각은 실제로는 기만이 아니라, 이전의 증거를 선호해서종종 자기도 모르게 내리는 무의식적인 의사결정의 결과다.|99|[우리의 감각을 믿어야 하는 이유]서두에서 논의했던 착시의 경우, 우리는 무언가에 속은 느낌이 들지 모른다.보이는 것이 거기에 실제로 있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맹시나 반향정위처럼 처리할 충분한 시각적 정보가 없다면 뇌는 우회로를 개발한다.우리 뇌가 실제로 경험하는 일은 추상이고 재현이다.객관적 경험과 주관적 경험의 혼합니다.우리는 단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실제 모습과 뇌가 보아야 할 모습을 혼합으로서 세계를 본다.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의 감각을 믿어야 할까?지각을 믿어야 할까?물론이다. 분명 가끔 지각 및 인식오류가 생기기는 한다.하지만 자주 생기지는 않으며, 대체로 치러야 할 대가가 작다.우리의 뇌가 그런 실수를 하는 까닭은 지각이 가정과 예측, 세계에 대한 교육받은 추측에 의존하기 대문이다.이 추측 덕분에 우리는 빠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으며,세계를 우리의 필요대로 지각할 수 있다.지각은 우리의 행동과 목표, 욕구에 이바지한다.지각은 우리를 계속 살아가게 한다.그런 까닭에 우리는 지각을 믿는다.지각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다.|137|

우리 뇌가 얼마나 많은 활동을 동시에 수행하는지 우리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뇌 수술 후 다른 사람이 되다]내가 고등학생일 때 친구 한 명이 끔찍한 자동차 사고를 당했다.어째선지 학교 가는 길에 차를 잘못 운전해서 나무에 부딪혔다.충격 때문에 얼굴의 뼈가 부러졌고 뇌 앞쪽의 주요 부위에 손상을 입었다 (전전두피질)몇 년 후 사고에서 회복된 그 애는 마침내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하지만 뭔가가 이상했다.그 애는 결코 이전과 똑같은 사람이 아니었다.......,다른 사람이 내 친구의 몸 안에 살고 있는 듯 했다.성격이 확연히 달라졌다.......,하지만 사고 후에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그 애가 말하는 데는 여러 달이 걸렸다.말을 다시 할 수 있게 된 후로 차츰 원 상태로 회복 되었다.그 애는 종종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내용이 혼란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재밌기도 했으며 때로는 모순적이었다.또한 완전히 지어낸 이야기거나 비밀로 해야 할 사건들도 들려 주었다.객관적으로 사실이 아닌 이야기도 꾸며냈다.|55|전전두피질이 성격의 어떤 측면을 조종하는 듯했다.구체적으로 보자면, 말하거나 행동하고 싶은 바를 결정하는 능력 그리고 부적절한 행동을 억제하는 능력을 관장했다.인지신경과학자들은 이 개념을 가리켜 기능의 국소화라고 부른다.복잡한 행동과 사고는 뇌의 여러 영역에 걸쳐 일어나기도 하지만,특정 행동은 피질의 특정한 영역에 국소적으로 관련될 수 있다.|56|뇌는 단백질과 지방으로 이루어진 빽빽한 기관이다.뇌는 외부 세계와 직접 접촉하지 않게 단단한 뼈로 둘러싸여 있다.뇌는 세계로 연결되며, 눈, 귀, 코, 손가락 및 다른 감각기관들을 통해 여러분의 인식을 확장한다.이런 입력은 다른 입력과 연결괴며, 그러한 연결이 세계에 대한 여러분의 경험을 구성한다.또한 이미 발생한 일을 기억과 지식의 형태로 표현하기도 한다.......,보통 사람이 뇌의 10%만 사용한다는 말은 틀렸다.여러분은 항상 뇌의 전부를 사용한다.이런 신경신화가 어디서 유래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슬쩍 봐도 터무니없는 소리다.......,우리가 뇌의 전체 활동의 작은 일부만 의식적으로 안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하지만 이는 인지적 한계일 뿐 생리적 한계는 아니다.이 한계는 어쩌면 우리에게 적응상의 이로움을 주려고 진화되었다.발생하는 모든 뇌 과정을 명시적으로 알아차리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우리는 항상 뇌의 전부를 사용하긴 하지만, 인지 체계가 진화해온 방식 때문에 그 활동의 작은 부분만 인식한다.이 한계 내지 병목이 우리가 사고하는 방식을 지배하는 가장 근본적인 측면 중 하나다.|59|뇌의 피질은 영역마다 내부 구조가 다를 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도 차이가 난다.어떤 사람은 뇌가 큰 반면에 어떤 사람은 뇌가 조금 작다.피질의 전체 크기는 일반적으로 뇌 자체의 크기와 상관관계가 있긴 하지만,뇌의 전체 크기가 꼭 지능이나 행동과 크게 관련이 있지는 않다.남성의 뇌가 여성의 뇌보다 아주 조금 더 큰 편이다(Ritchie et al.. 2018)일부 영역들에서 여성 뇌는 연결성이 조금 더 높은 수준이었다.|60|[백색 물질과 회색 물질]뇌는 백색 물질과 회색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둘은 밀도가 다르다.둘 다 인지 기능과 행동에 매우 중요하다.회색 물질은 우리가 뇌를 볼 때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으로,뉴런 세포들의 집합니다.뉴런은 크기와 구조 면에서 굉장히 다양하다.높은 수준의 사고에 깊이 관여하는 뇌 부위는 고작 몇 마이크론 내지 밀리미터 길이의 세포들로 구성되며다른 뉴런들과 조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백색 물질은 지방 조직으로서, 연결 조직 그리고 뉴런의 일부를 감싸고 있는 미엘린이 대부분이었다.뉴런에는 다른 뉴런과 연결되는 부위인 축삭돌기와 가지돌기가 있다.학슴에 중요한 물질인 미엘린은 두 돌기 중에서 축삭돌기를 감싸는 정면체 조직이다.이 절연체는 연결 속도 향상에 중요하다.일반적으로 전연이 많이 된 뉴런일수록 전기 자극이 한 뉴런의 말단에서 다른 뉴런의 말단으로 더 빠르게 이동하기에,인지 처리의 전반적인 속도가 높아진다.[4가지 엽]여러분이 뇌는 단지 하나의 큰 덩어리가 아니다.뇌의 생리와 기능은 엽이라고 하는 4가지 영역으로 체계적으로 조직되어 있다.후두엽은 머리 뒤쪽에 위치하며, 두개골에 바로 맞닿아 있다.후두엽의 주된 기능은 시각이다.눈에서 뇌 뒤쪽으로 이어지는 시각 경로야말로 실제로 정보처리에 도움을 준다.게다가 대단히 큰 도움을 주는지라, 눈에 들어온 시각 정보는 뇌에 도달할 때쯤이면,사물의 위치, 색깔, 대략적인 윤곽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를 담은 덩어리 상태로 부분적으로 처리가 되어 있다.눈으로 들어온 정보믄 시각 경로를 따라 후두엽의 가장 뒤쪽에 도달한 다음,이어서 뉴런 정보가 다시 뇌의 앞쪽 방향으로 흐른다.이 과정에서 연쇄적으로 구성된 신경망은 정보를 차근차근 분해해 모서리, 윤곽, 모서리와 윤곽의 공간적 위치,움직임과 같은 개념적 특징들을 도출해낸다.시각 기관에서 들어온 정보가 나뉘어 한쪽은 뇌의 위쪽인 두정엽으로 가고 한쪽은 특두엽으로 간다.두정엽은 감각 및 공간 통합을 담당하는데, 그런 까닭에 후두엽에서 두정엽으로 이어지는 시각적 정보 흐름을 가리켜 종종'어디에 시스템'이라고 한다.후두엽에서 시각 정보에 의해 활성화된 뉴런은 정보를 측두엽으로도 보낸다.이 흐름을 가리켜 '무엇 시스템'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서 무언가에 이름을 붙이고 개념을 형성하기 때문이다.측두엽은 시각과 기걱에 관여하므로 언어 처리가 많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하다.|66|뇌 앞쪽에는 눈 뒤에 전두엽아라는 적절한 이름의 영역이 있다.뇌의 이 영역은 손,입술,머리 움직이기와 같은 운동 활동을 담당한다.또한 전두엽의 뒤쪽에는, 정수리에서 부터 두정엽의 측면가지 띠처럼 이어진 운동신경대라는 영역이 있다.이 두영역은 함께 인체의 모든 부위로 감각-운동 정보를 송수신한다.또한 전두엽에는 측두엽 바로 옆에 위치한 영역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음성언어를 만들어낸다.전두엽의 가장 앞쪽은 내가 앞에서 전전두피질이라고 부른 영역이다.이 영역은 인간에게 고유하지는 않지만, 다른종과 비교할 때 전전두피질이 얼마나 크냐는 점에서 보면 고유하다.[피질 하부 구조]해마는 관자놀이 부근의 표면 아래레 위치해 있다.해마는 인간 이외의 다른 많은 종에서도 보이며, 기억을 생성하고 일관성 있게 유지하는 일을 담당한다.밀너는 모든 기억에 이 해마 시스템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아냈다.새로운 행동과 절차에 관한 기억에는 이 시스템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69|최근에 건물이 철거된 장소 곁을 지나며, 거기에 무엇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은 적이 있는가?설령 매일 지나가는 장소라 해도, 거기에 뭐가 있었는지 기억하기 어려울 수 있다.우리는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어떤 거리 풍경의 세부 내용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건물이 없어지고 나서야 건물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건 물이 거리 풍경에서 차지했던 역할을 알아차린다.우리의 사고와 행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만사가 제대로 돌아가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정보를 처리하는지,그리고 우리 뇌가 얼마나 많은 활동을 동시에 수행하는지 우리는 알아차리지 못한다.|71|

백발

[눈보라]몇 년 전 대설주의보가 내렸을 때였다.눈보라가 치는 서울의 언덕길을 그녀는 혼자서 걸어올라가고 있었다.우산을 썻지만 소용없었다.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얼굴로, 몸으로, 세차게 휘몰아치는 눈송이들을 거슬러 그녀는 계속 걸었다.알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일까. 이 차갑고 적대적인 것은?동시에연약한 것, 사라지는 것,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것은?|64|[손수건]후미진 주택가 건물 아래를 걷던 늦여름 오후에 그녀는 봤다.어떤 여자가 삼층 베란다 끝에서 빨래를 걷다 실수로 일부를 떨어뜨렸다.손수건 한 장이 가장 느리게, 마지막으로 떨어졌다.날개를 반쯤 접은 새처럼, 머뭇머뭇 내려앉을 데를 살피는 혼처럼.|76|[백목련]여러 해 뒤 그 생명-재생-부활의 꽃나무들 아래를 지나다 그녀는 생각했다.그때 왜 우리는 하필 백목련을 골랐을까.흰꽃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걸까, 아니면 죽음과?인도유럽어에서 텅 빔blank, 검음 black과 불꽃flame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는다고 그녀는 읽었다.어둠을 안고 타오르는 텅 빈 흰 불꽃들 - 그것이 삼월에 짧게 꽃피는 백목련 두 그루인 걸까?|79|[불빛들]겨울이 ㅇ유난히 혹독한 이 도시에서 그녀는 십이월의 밤을 통과하는 중이다.창밖은 달 없이 어둡다.......,그렇다 해도 저 불및들은 여전히 명료한 정적과 고립속에서 하얗게 얼어붙어 있을 것이다.|83|그런 밤에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 바다가 떠오르기도 한다.[백발]새의 깃털처럼 머리가 하얗게 센 다음에 옛 애인을 만나고 싶다던 중년의 직장 상사를 그녀는 기억한다.완전히 늙어서......한 올도 남김없이 머리털이 하얗게 세었을 때.그때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다면 꼭 그때.젊음도 육체도 없이.열망할 시간이 더 남지 않았을 때.만남 다음으로는 단 하나,몸을 잃음으로써 완전해질 결별만 남아 있을때.|90|[구름]거대한 흰 구름과 검은 구름 그림자가 빠른 속력으로 먼 하늘과 땅에서 나란히,함께 흘러 나아갔어.|91|[백야]지금 이 도시에서 그녀가 통과하는 시간은 그렇게 흰 밤일까.혹은 검은 낮일따?묵은 고통은 아직 다 오므라들지 않았고 새로운 고통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완전한 빛이나 완전한 어둠이 되지 않은 하루들은 과거의 기억들로 일렁거린다.반추할 수 없는 건 미래의 기억뿐이다.무정형의 빛이 그녀의 현재 앞에, 그녀가 모르는 원소들로 가득찬 기체와 같은 무엇으로 어른거리고 있다.|94|[빛의 섬]그녀가 무대에 오른 순가느 강한 조명이 천장에서부터 쏘아져 내려와 그녀를 비췄다.그러자 무대를 제외한 모든 공간이 검은 바다가 되었아.......,그녀는 혼란에 빠졌다.저 해저 같은 어둠 속으로 더듬더듬 걸어내려갈 것인지,이 빛의 섬에서 더 버틸 것인지.|95|[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원한이라고 부르기엔 연약하고, 원망이라고 부르기에는 얼마간 독한 마음이었다.......,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같은 죽음이 그 얼굴 뒤에 끈질기게 어른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자신을 버린 적 있는 사람을 무람없이 다시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그녀가 삶을 다시 사랑하는 일은 그때마다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97|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눈을 바라본다.

[나]두달 가까이 시간이 더 흘러 추워지기 시작한 밤.익숙하고도 지독한 친구 같은 편두통 때문에 물 한컵을 데워 알약들을 삼키다가(담당하게) 깨달았다.어딘가로 숨는다는 건 어차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10|그렇게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살아온 만큼의 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디디고,의지가 개입할 겨를 없이,서슴없이 남은 한 발을 허공으로 내딛는다.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에 방법이 없기 때문에.지금 이 순간도 그 위태로움을 나는 느낀다.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속으로,쓰지 않은 책 속으로 무모하게 걸어들어 간다.|11|[안개]움직이는 단단한 섬처럼 행인들 사이를 통과해 나아갈 때,때로 나의 육체가 어떤 감옥처럼 느껴진다.내가 겪어온 삶의 모든 기억들이,그 기억들과 분리해 낼 수 없는 내 모국어와 함께 고립되고 봉인된 것처럼 느껴진다.고립이 완고해질수록 뜻밖의 기억들이 생생해 진다.합도하듯 무거워진다.지난 여름 내가 도망치듯 찾아든 곳이 지구 반대편의 어떤 도시가 아니라,결국 나의 내부 한가운데 였다.|23|[눈]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눈을 바라본다.버스에서라면 얼굴을 들고 한동안 차창 밖을 응시한다.어떤 소리도 없이, 아무런 기쁜도 슬픔도 없이 성근 눈이 흩어질 때,이윽고 수천수만의 눈송이들이 침묵하며 거리를 지워갈때,더이상 그걸 지켜보지 않고 얼굴을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53|[진눈깨비]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모든 것은 지나간다.그 사실을 기억하며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 눈을 감아도 떠도,걸음을 멈춰도 더 빨리해도 눈썹을 적시는,물큰하게 이마를 적시는 진눈깨비.|59|

채식주의자 - 나무불꽃 중에서

[면회]그녀는 비에 젖은 도로를 바라보며 서 있다.마석읍 터미널 건너편의 버스정류장이다.거대한 화물차들이 굉음을 내며 일차선을 질주해 지나간다.빗발은 그녀의 우산을 뚫고 들어올 듯 거세다.......,축성 정신병원 가지요?늦은 중년의 버스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올라오라는 손짓을 한다.차비를 낸 뒤 의자를 찾는 그녀의 눈에 승객들의 얼굴이 들어온다.모두 그녀를 주시하고 있다.환자인가. 보호자인가? 어디 이상한 구석은 없나,의심과 경계, 혐오와 호기심이 얽힌 그들의 시선을 그녀는 익숙하게 외면한다.|181|영혜가 사라졌다는 전화를 받은 오후 네시경 그녀는 여섯살 난 아들 지우와 함게 있었다.지우의 체온이 닷새째 사십도를 맴돌아 폐 사진을 찍으로 간 참이었다.불안한 듯 촬영실 안의 기사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며 지우는 촬영기 앞에 혼자 서 있었다.김인혜씨세요?그런데요.김영혜씨 보호자 되시죠.영혜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서 그녀의 휴대폰으로 먼저 연락해온 것은 처음이었다.그녀가 면회시간을 예약하거나, 때로 동생에게 별일이 없는지 묻기 위해 전화를 걸곤 했을 뿐이었다.간호사는 다급함을 감춘 침착한 말씨로 실종상황을 전했다.저희가 최선을 다해 찾고 있지만, 혹시 그쪽으로 가면 바로 이리 전화주셔야 합니다.|184|아홉시가 되어가던 참이ㅓㅆ다.찾으셨다구요.정말 다행이네요.면회는 예정대로 다음주에 갈게요.진심을 담아 감사하다고 인사하긴 했지만, 피로 때문에 그녀의 목소리는 착잡하게 가라앉아 있었다.그날 전국적으로 비가 내렸다는 것을,그러니까 영혜가 발견된 산에도 비가 쏟아지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전화를 끊고 나서였다.|185|빗속의 병사(病舍)들은 고적하다.짙은 회색의 콘크리트 벽면은 비에 젖은 탓에 평소보다 어둡고 육중해 보인다.이층과 삼층에 배치된 병실의 창들은 철창살로 막혀있다.맑은 날에는 그 사이로 얼굴을 내민 환자를 보기 어렵지만,이런 날씨에는 비를 구경하는 환자들의 회색 얼굴이 여럿 보인다.영혜의 병실이 있는 별관 건물의 삼층을 어림해 올려다보다가,그녀는 매점과 면회실로 통하는 원무과 쪽 입구를 걸어들어간다.박인호 선생님을 뵙기로 했는데요.|196|[후회]막을 수 없었을까.두고두고 그녀는 의문했다.그날 아버지의 손을 막을 수 없었을까.영혜의 칼을 막을 수 없었을까.남편이 피 흘리는 영혜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간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정신병원에서 돌아온 여예를 제부가 냉정히 버린 것을 말릴 수 없었을까.그리고 남편이 영혜에게 저지른 일을, 이제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일을,값싼 추문이 되어버린 그 일을 돌이킬 수 없었을까.그렇게 모든것이 - 그녀를 둘러산 모든사람의 삶이 모래산처럼 허물어져버린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200|그녀는 계속해서 살아갔다.등뒤에 끈질긴 추문을 매단 채 가게를 꾸려나갔다.시간은 가혹할 만큼 공정한 물결이어서,인내로만 단단히 뭉쳐진 그녀의 삶도 함께 떠밀고 하류로 나아갔다.그 가을 다섯살이던 지우는 이제 여섯살이 되었고,환경이 좋고 입원비가 합리적인 이 병원으로 옮길 때쯤 영혜의 상태는 매우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203|[재회]삼십분쯤 시간을 드리겠습니다.성공하면 간호사실에 알려주세요.아니면 두시에 뵙지요.그냥 얘기를 끝내기 미안했던지,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 같던 의사는 조금 더 대화를 이글어간다.지난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신경성 거식증의 경우 십오에서 이십 퍼센트가 기아로 사망합니다.뼈만 남았어도 본인은 살이 쪘다고 생각하죠.지배적인 어머니와의 갈등이 주된 심리적 이유가 되고......하지만 김영혜씨 같은 경우는 정신분열증이면서 식사를 거부하는 특수한 경우예요.중증의 정신분열증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솔직히 예측 못했ㅅ브니다.|205|수속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영혜에게 말했다.여긴 공기가 좋아서 입맛이 더 좋아질 거야.좀 많이 먹고 살이 붙어야지.그즈음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한 영혜는 창밖의 느티나무에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응......여기엔 큰 나무들이 있네.|209|언니.영혜의 낡은 검은 스웨터에서 희미한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영혜는 한번 더 언니. 하고 속삭였다.언니, ......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210|서쪽 복도의 저 자리에서 물구나무서 있는 기괴한 여환자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그녀는 설마 영혜이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영혜야.대답이 없자 그녀는 좀더 큰 소시로 불렀다.영혜야. 지금 뭘하고 있어. 똑바로 서봐.그녀는 영혜의 달아오른 뺨에 손을 뻗었다.똑바로 서, 영혜야. 머리 안 아파? 얼굴이 새빨갛잖아.......,그녀가 탁자에 음을 을 풀어놓으려 하자 영혜는 말했다.언니, 이제 이런 거 안 가져와도 돼.영혜는 웃었다.나, 이제 안 먹어도 돼.그건 또 무슨 소리야.......,......언닌, 알고 있었어?대답 대신 영혜는 물었다.......뭘?난 몰랐거든.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이제야 알게 됐어.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구, 봐. 저거 봐. 놀랍지 않아?영혜는 벌떡 일어서서 창을 가리켰다.모두, 모두 다 물구나무서 있어.까르륵 .혜가 웃었다. 그제야 그녀는 영혜의 표정이 어린시절의 어는 순간과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외꺼풀 눈이 가늘어지며 온통 까매지는 순간, 영혜의 입에서 까르륵, 무구한 웃음이 터져나오곤 했다.|216|어떻게 내가 알게 됐는지 알아?꿈에 말이야, 내가 물구나무서 있었는데......내 봄에서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땅속으로 팔고 들었어.끝없이, 끝없이......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열에 들뜬 영혜의 두 눈을 그녀는 우두망찰 건너다보았다.나, 몸에 물을 맞아야 하는데. 언니, 나 이런 음식 필요없어. 물이 필요한데.|216|언니, 나 여기서 나가게 해줘.이제 완연히 살히 빠져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얼굴로 영혜는 속삭였다.길게 말하기 힘든지 자주 말을 끊었고, 가쁜 숨소리가 거칠게 섞여나왔다.사람들이, 자꾸만 먹으라고 해......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여. 지난번에 먹구선 토했다구......어젠 먹자마자 잠자는 주사를 놨어.언니, 나 그 주사 싫어. 정말 싫어......내보내줘. 나 여기 있기 싫어.|228|네가! 죽을까봐 그러잖아!영혜는 고개를 돌려, 낯선 여자를 바라보듯 그녀를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이윽고 흘러나온 질문을 마지막으로 영혜는 입을 다물었다.......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229|미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더이상은 견딜 수 없다.더 앞으로 갈 수 없다.가고 싶지 않다.그녀는 다시 한번 집 안의 물건들을 둘러보았다.그것들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그녀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거과 꼭 같았다.|242|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했다.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때로는 소리내어 웃기까지 한다.아마 그도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때,잊혀졌던 연민이 마치 졸음처럼 쓸쓸히 불러일으켜지기도 한다.|247|......어쩌면 꿈인지 몰라.그녀는 고개를 수그린다.무언가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영혜의 귓바퀴에 입을 바싹 대고 한마디씩 말을 있는다.꿈속에선, 꿈이 전무인 것 같잖아.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그녀는 고개를 든다.구급차는 축성산을 벗어나는 마지막 굽잇길을 달려나가고 있다.솔개로 보이는 검은 새가 먹구름장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이 보인다.쏘는 듯한 여름햇살이 눈을 찔러, 그녀의 시선은 그 날개짓을 더 따라가지 못한다.

2.몽고반점 3의3

[재회]"그거 지우지 말아주겠어? 내일 까지만이라도, 아직 덜한 게 있어. 한번 더 찍어야 할 것 같아."혹시 그녀는 웃고 있는가. 그가 볼 수 없는 전화선 저족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가.?......지우고 싶지 않아서 씻지 않았어요."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꿈을 꾸지 않아요. 나중에 지워지더라도 다시 그려주면 좋겠어요."......,"내일 시간이 되면 한번 더 거기로 오겠어? 선바위 작업실.""......좋아요.""그런데, 한 사람이 더 올거야. 남자야.""......""그 사람도 옷을 벗고 꽃을 그릴 거야. 그래도 괜찮겠어?"그는 기다렸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그녀의 침묵이 대체로긍정을 내포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그는 더이상 불안하지 않았다."......좋아요."|142|"옷을 벗어."그녀는 옷을 벗었다.이날은 그날만큼 햇빛이 밝지 않았으나, 젓가슴 가운데 그려진 황금빛 꽃송이가 찬란하게 반짝였다.J와는 대조적으로 그녀의 태도는 태연했다.마치 '옷을 입은 것보다 벗는 게 자연스럽잖아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무릎을 세우고 앉은 J의 얼굴이 일순 황홀하게 굳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그가 시키지 않았는데 그녀는 J의 곁으로 다가갔다.J가 앉은 모습을 융내내듯 흰 시트 위에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말없는 그녀의 얼굴과 찬란한 육체가 쓸쓸한 대조를 이뤘다.|150|"좋아.....계속해. 그대로 몸을 겹쳐 누워봐.:그녀는 부드럽게 J의 가슴을 밀어 시트 위에 눕혔다.두손을 부드럽게 J의 아랫배로 이르는 붉은 꽃잎 한장 한장을 쓰다듬어 내려왔다.그는 캠코더를 들고 그녀의 뒤쪽으로 돌아가, 그녀의 등에 흐드러진 자줏빛 꽃들을,그녀의 몸짓에 다라 흔들리는 몽고 반점을 찍었다.이거야, 라고 그는 이름 물고 생각했다.여기서 더 나아갈 수 있다면.......,"혹시......혹시 말이야."그는 J와 그녀를 번갈아 보았다."......정말로 할 수 있겠어?"그녀의 얼굴에는 흔들림이 없었으나, J는 마치 뜨거운 것에 덴 듯 그녀를 밀치고 물러섰다.무릎을 세워 oo를 감추며 말했다."뭬예요. 포르노를 찍자는 거예요?""내키지 않는다면 하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자연스럽게 가능하다면......""난, 그만 두겠어요."J는 일어섰다.|153|[넘지 말아야 할 선]J의 차가 요란한 시동소리를 낸 뒤 앞마당을 떠났을때,주섬주섬 스웨터를 입은 그녀에게 그는 사과했다.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청바지에 다리를 끼운 뒤 지퍼를 올리려다 말고,허공을 향해 피식 웃었을 뿐이었다."왜 웃어?""다 젖어 버려서......".......,그는 캠코더를 내려놓고 성큼성큼 걸어가 조금 전 J가 나간 문을 잠갔다.한번 잠근 것으로 모자라 윗부분의 방범체인까지 잠갔다.그리고 거의 달리다시피 걸음을 빨리해,그녀를 겨안고 시트위로 쓰러졌다.그녀의 청바지를 무릎가지 글어내렸을 대 그녀가 말했다."안 돼요".......,"그 자신이 마음에 들었던 거야?""그게 아니라, 꽃이......""꽃?"......,"그렇다면......"자신의 목소리가 비명 같다고 그는 느꼈다."내 몸에 곷을 그리면, 그땐 받아주겠어?"그녀는 물끄러미 그를 돌아다 보았다. 당연하죠,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이었다.아니, 최소한 그는 그렇게 느꼈다.|158|그는 온통 소름이 돋아 있는 자신의 가슴과 배, 다리를, 거기 그려진 거대한 붉은 꽃을 내려다보았다."마음에 들어, 나보다 더 잘 그렸어.""뒷모습이 어떨지 모르겠어. 형 스케치는 뒷모습에 더 중점을 둔 것 같던데."......,"안돼 보여, 온몽에 꽃을 그려놓은 형 모습이......불쌍하단 생각이 들어, 한번도 형한테서 그런 느낌 받은적 없었는데."P는 그에게 다가와 셔츠의 윗단추를 마저 채워주었다.......그는 으르렁거리며 그녀를 눕혔다.한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며, 그녀의 입술과 코를 닥치는 대로 빨며 자신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아랫부분의 단추들은 아예 뜯겨지도록 잡아당겨버렸다.벌거숭이가 된 그는 그녀의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미안해."어둠에 잠긴 그녀의 얼굴을 더듬으며 그가 말했다.그녀는 대답 대신 물었다."불을 켜도 되겠어요?"침착한 목소리였다."......왜?""제대로 보고 싶어서."......,|168|영원히, 이 모든 것이 영원히......라고 그가 견딜 수 없을 만족감으로 몸을 떨었을 대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삼십분 가까이 신음 한번 내지 않고, 이따금 입술을 떨며, 줄곧 눈을 감은 채로 예민한 희열을 몸으로만 그에게 전해주던 그녀였다.이제 끝내야 한다.그는 상체를 일으켰다.그녀를 안은 채 캠코더로 다가가, 더듬더듬 손을 벋어 전원을 껏다.|170|"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오."그녀는 말했다."고기만 안 먹으면 그 얼굴들이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그녀의 말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의지와 무관하게 차츰 그의 눈은 감겼다."그러니까......이제 알겠어요. 그게 내 뱃속 얼굴이라는 걸, 뱃속에서부터 올라온 얼굴이라는 걸."앞뒤로 알 수 없는 그녀의 말을 자장가 삼아, 그는 끝없이 수직으로 낙하하듯 잠들었다."이제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하지 않을 거에요."|172|[막장]그가 깨어났을 때 그녀는 아직 잠들어 있었다.......,이상하다, 생각하며 주워들고 가벽을 돌았을 때, 그는 식탁에 얼굴을 엎드리고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아내였다.......,"구급대를 불러놨어요.""뭐라구?"아내는 희끗하게 질린 얼굴로, 다가오는 그를 피해 뒤로 물러섰다."영혜도, 당신도 치료가 필요하잖아요."그녀의 말의 진의를 파악하는 데 수초의 시간이 걸렸다."......나한테 정신병원에 들어가라는 거야?"......,"나쁜 새끼."아내는 낮은 소리로, 눈물을 삼키며 중얼거렸다."아직 정신도 성치 않은 애를......저런 애를."아내의 젖은 입술이 파들 거렸다......,지금 베란다로 달려가 그녀가 기대서 있는 난간을 뒤어넘어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삼층 아래로 떨어져 머리를 박살낼 수 있을 것이다.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그것만이 깨끗할 것이다.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 못박혀 서서, 삶의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인 듯,활활 타오르는 꽃 같은 그녀의 육체, 밤사이 그가 찍은 어떤 장면 보다강렬한 이미지로 번쩍이는 육체만을 응시하고 있었다.|178|

첫눈오는날

오십 중반을 넘긴 지금도,첫눈을 기다리는 마음이 여전히 살아있을까.바쁜 일상 속에서도 문득문득 첫눈이 내릴 날을 기대하곤 했다.그리고 2024년 11월 27일, 드디어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첫눈이라기엔 너무도 거세게, 끝도 없이 쏟아졌다.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고,눈을 반기던 설렘도 잠시였다.이내 사람들 사이에는'집에 어떻게 가야 할지'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번졌다.그렇게 폭설로 가득 찬 하루가 지나고,한동안 경기도 화성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가끔 눈발이 날리긴 했지만,퇴근길엔 이미 바닥조차 마른 채였다.---시간이 흘러 어느덧 한 달 남짓 지난 오늘,점심을 먹으러 밖으로 나가던 중,문득 눈에 들어온 풍경이 있었다.녹지 않은 채 지붕 위에 고스란히 쌓여 있는 눈.그리고 식당 창밖으로 보이는 산자락에도첫눈이 그대로 얼어붙은 듯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누군가는 음지라서 그렇다고 했고,또 누군가는 그곳에 더 많은 눈이 왔을 거라고 했다.왜 그날의 눈이 아직도 저렇게 남아 있는 걸까.별다른 관심 없이 지나치려던 순간,그 눈 위로 겹겹이 쌓인 나의 마음을 보았다.녹지 않고, 흩어지지 않는 저 눈처럼 말이다.그날 이후로,따스한 햇살이 내리쬔 날도 있었고,바람이 세차게 몰아친 날도 있었다.그런데도 저 눈은 여전히 녹지 않고,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마치 시간에 닳지 않는 어떤 마음처럼.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녹지 않는 눈은 있을 리 없다.아마도 내가 만든 음지 속에서,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눈을 다시 쌓아 올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결국은 나의 마음이 그늘을 만들고,구름과 얼음 같은 감정을 쌓아저 눈을 녹이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일지도.흩어지지도, 녹지도 않은 채,여전히 내 마음 속에 머무는어떤 겨울의 풍경을 바라본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날에는

어떤 날은 일이 잘 풀리지 않습니다.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일이 풀리도록 노력할 마음조차 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런 날이 잦아지는 것 같아 조금은 초조해지기도 하고,"이제는 받아들여야 하나?"라는 자조 섞인 생각도 들곤 합니다.마치 엉킬 대로 엉켜버린 실타래를 바라보며,그것을 풀어야 할지 잘라야 할지 고민하는 순간처럼,마음을 다잡아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대로 내버려 둬야 하는 걸까 하는 갈등이 시작됩니다.텅 비어 있는지, 꽉 차 있는지도 구별되지 않는 머릿속은 혼란스럽고,그로 인해 머리가 다시 지끈거리기도 합니다.주변 사람들은 이런 날에는 쉬라고도 하고,마음을 추스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추천해주기도 합니다.심호흡을 크게 해보라거나, 크게 웃어보라는 조언도 듣습니다.시기와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몸도 마음도 결국 자연에서 온 것이라면, 자연을 닮아가는 게 답이 아닐까요?물이 흐르듯, 억지로 무언가를 하려 하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둔다면 어떨까요?"살다 보니 그런 날도 있더라."그렇게 중얼거리며 마음속 푸념을 흘려보내고,오늘 하루를 견딥니다. 저녁 즈음,마음 맞는 사람들과 가볍게 소주 한잔 기울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여러분은 그런 날, 어떻게 하시나요?]

베이징, 그리고 추억의 단상

베이징, 그리고 추억의 단상2019년 12월, 겨울의 찬 바람을 맞으며 베이징 공항에 도착했다.코로나19가 세상을 흔들기 시작하던 그 시점에 나는 베이징에서 주재원 생활을 시작했다.코로나가 전 세계를 뒤덮던 동안, 단 한 번도 한국에 돌아갈 수 없었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2021년 11월, 마침내 한국으로 복귀했다.베이징에서의 시간은 결코 쉽지 않았다.엄격한 통제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날들이 이어졌다.하지만 모든 것이 나빴던 것은 아니다.아무도 없는 도로를 홀로 걸으며 고요함을 만끽할 수 있었고,인구가 많은 중국에서 보기 힘든 한산한 공항과 관광지를 둘러보는 특별한 경험도 가끔은 가능했다.아마도 누구보다 엄한 시기에 베이징에 있었기에,그곳에 대한 그리움이 더 깊이 남았던 것 같다.베이징에서 돌아온 뒤, 한 달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그때의 마음을 글로 적어 내려갔다.그 어설픈 글이 이제 내 손에 남아 있다.---**벌써 한 달이 지났다.**사람이라는 존재는 참 간사하다.변심이 죽 끓듯 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그런데 이렇게 빨리 적응하고, 또 빨리 잊혀지는 것은 과연 괜찮은 걸까.잊고 싶지 않은 기억들은 켜켜이 쌓여 추억이 되는 것일까?하지만 모든 켜켜이 쌓인 것들이 추억이라고 할 수 있을까?왠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어떤 기억은 잊히기를 바란다.또 어떤 기억은 간직되기를 바라지만,그것조차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잊히길 바라는 기억들에 굳이 ‘추억’이라는 이름을 붙여 남겨두고 싶지도 않다.돌이켜보면 과거의 기억조차 스스로에게 유리한 것만 골라 간직하려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추억이란 과연 무엇일까.어쩌면 추억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지금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만을 우리는 추억이라 부른다.기억되지 못한 채 버려진 것들은,추억이라는 이름조차 얻지 못하고 사라질 뿐이다.그렇기에 추억은 어쩌면 시간이 아닌,지금 나와 함께 머무는 또 다른 형태의 현재일지도 모른다.

불안감에 대하여

불안감은 어떤 마음일까? 불안감은 단순한 감정일까,아니면 그보다 더 깊은 무언가일까?우리가 불안감에 사로잡히는 순간, 집중력은 급격히 낮아지고,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이면 마치 심해의 늪으로 빠져들 듯이 어딘가 숨어버리고 싶어진다.때로는 술에 자신을 맡기기도 하고,불안감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칠수록 더 깊은 늪에 빠져드는 기분이 든다.늪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몸부림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하지만 극도의 불안감은 우리를 자연스럽게 몸부림치게 만든다.어쩌면 우리는 위기의 순간에 스스로를 크게 보이고, 강하게 보이려 애쓰는 것이 생존을 위한 본능임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불안감은 갑작스러운 걱정에서 시작된다.평온한 마음을 깨뜨리는 최초의 불씨는 걱정이며, 이내 걱정은 두려움으로 진화한다.두려움은 곧 불안감으로 변하며, 우리의 행동과 생각을 제약하고, 결국 스스로를 꼼짝달싹 못 하게 만든다.그렇다면, 이 불안감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불안감으로부터 탈출해야만 인간의 장점인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력을 되찾을 수 있다.이성을 통해 두려움의 반대편을 바라볼 수 있게 되며,그 순간 비로소 걱정의 대상을 명확히 이해하고 그것이 나에게 미칠 영향을 계산할 수 있다.학계에서는 우리가 걱정하는 일의 80~90퍼센트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그러나 우리는 그 가능성이 없는 걱정들까지 모두 떠안으며,그로 인해 전체에 대한 대안을 마련할 수 없다는 판단에 스스로 대처 능력을 포기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그렇기에 우리의 뇌에게 포기하라는 명령을 내려서는 안 된다.불안감에 사로잡힌 순간, 처음으로 돌아가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사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 노력해야 한다.눈을 크게 떠 현실을 직시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인류가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두려움을 극복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두려움과 불안감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지만,그것을 넘어서려는 의지가 결국 우리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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