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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6 07:50 79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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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

BoOk

━━━ 눈보라 ━━━

몇 년 전 대설주의보가 내렸을 때였다.

눈보라가 치는 서울의 언덕길을 그녀는 혼자서 걸어올라가고 있었다.

우산을 썻지만 소용없었다.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얼굴로, 몸으로, 세차게 휘몰아치는 눈송이들을 거슬러 그녀는 계속 걸었다.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일까. 이 차갑고 적대적인 것은?

동시에연약한 것, 사라지는 것,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것은?

64 페이지 중에서...


━━━ 손수건 ━━━

후미진 주택가 건물 아래를 걷던 늦여름 오후에 그녀는 봤다.

어떤 여자가 삼층 베란다 끝에서 빨래를 걷다 실수로 일부를 떨어뜨렸다.

손수건 한 장이 가장 느리게, 마지막으로 떨어졌다.

날개를 반쯤 접은 새처럼, 머뭇머뭇 내려앉을 데를 살피는 혼처럼.

76 페이지 중에서...


━━━ 백목련 ━━━

여러 해 뒤 그 생명-재생-부활의 꽃나무들 아래를 지나다 그녀는 생각했다.

그때 왜 우리는 하필 백목련을 골랐을까.

흰꽃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걸까, 아니면 죽음과?

인도유럽어에서 텅 빔blank, 검음 black과 불꽃flame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는다고 그녀는 읽었다.

어둠을 안고 타오르는 텅 빈 흰 불꽃들 - 그것이 삼월에 짧게 꽃피는 백목련 두 그루인 걸까?

79 페이지 중에서...


━━━ 불빛들 ━━━

겨울이 ㅇ유난히 혹독한 이 도시에서 그녀는 십이월의 밤을 통과하는 중이다.

창밖은 달 없이  어둡다.

......,

그렇다 해도 저 불및들은 여전히 명료한 정적과 고립속에서 하얗게 얼어붙어 있을 것이다.

83 페이지 중에서...


그런 밤에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 바다가 떠오르기도 한다.


━━━ 백발 ━━━

새의 깃털처럼 머리가 하얗게 센 다음에 옛 애인을 만나고 싶다던 중년의 직장 상사를 그녀는 기억한다.

완전히 늙어서......

한 올도 남김없이 머리털이 하얗게 세었을 때.

그때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다면 꼭 그때.

젊음도 육체도 없이.

열망할 시간이 더 남지 않았을 때.

만남 다음으로는 단 하나,

몸을 잃음으로써 완전해질 결별만 남아 있을때.

90 페이지 중에서...


━━━ 구름 ━━━

거대한 흰 구름과 검은 구름 그림자가 빠른 속력으로 먼 하늘과 땅에서 나란히,

함께 흘러 나아갔어.

91 페이지 중에서...


━━━ 백야 ━━━

지금 이 도시에서 그녀가 통과하는 시간은 그렇게 흰 밤일까.

혹은 검은 낮일따?

묵은 고통은 아직 다 오므라들지 않았고 새로운 고통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완전한 빛이나 완전한 어둠이 되지 않은 하루들은 과거의 기억들로 일렁거린다.

반추할 수 없는 건 미래의 기억뿐이다.

무정형의 빛이 그녀의 현재 앞에, 그녀가 모르는 원소들로 가득찬 기체와 같은 무엇으로 어른거리고 있다.

94 페이지 중에서...


━━━ 빛의 섬 ━━━

그녀가 무대에 오른 순가느 강한 조명이 천장에서부터 쏘아져 내려와 그녀를 비췄다.

그러자 무대를 제외한 모든 공간이 검은 바다가 되었아.

......,

그녀는 혼란에 빠졌다.

저 해저 같은 어둠 속으로 더듬더듬 걸어내려갈 것인지,

이 빛의 섬에서 더 버틸 것인지.

95 페이지 중에서...


━━━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

원한이라고 부르기엔 연약하고, 원망이라고 부르기에는 얼마간 독한 마음이었다.

......,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같은 죽음이 그 얼굴 뒤에 끈질기게 어른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버린 적 있는 사람을 무람없이 다시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가 삶을 다시 사랑하는 일은 그때마다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

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97 페이지 중에서...


- [흰 ], 페이지 중에서... -

nTalk

━━━ 백발 ━━━

새의 깃털처럼 머리가 하얗게 센 다음에 옛 애인을 만나고 싶다던 중년의 직장 상사를 그녀는 기억한다.

완전히 늙어서......

한 올도 남김없이 머리털이 하얗게 세었을 때.

그때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다면 꼭 그때.

젊음도 육체도 없이.

열망할 시간이 더 남지 않았을 때.

만남 다음으로는 단 하나,

몸을 잃음으로써 완전해질 결별만 남아 있을때.

90 페이지 중에서...


왜 모든 기운이 사라진 그때 만나고 싶은 걸까?

어쩌면 진정으로 사랑을 했는지 의심했을 것 같다.

맞다! 우리는 항상 누군가를 그리워 하면서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의심한다.

아니 어쩌면 의심이 아니라, 자신을 너무 잘 알기에 내리는 정확하고 이성적인 판단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난 확인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확인해서, 진정으로 사랑을 하고 있다한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것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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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흰 (한강 소설ㅣ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지은이: 한강

출판사: 문학동네

출판일: 20180425

ISBN: 978895465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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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보라 ━━━

몇 년 전 대설주의보가 내렸을 때였다.

눈보라가 치는 서울의 언덕길을 그녀는 혼자서 걸어올라가고 있었다.

우산을 썻지만 소용없었다.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얼굴로, 몸으로, 세차게 휘몰아치는 눈송이들을 거슬러 그녀는 계속 걸었다.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일까. 이 차갑고 적대적인 것은?

동시에연약한 것, 사라지는 것,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것은?

64 페이지 중에서...


━━━ 손수건 ━━━

후미진 주택가 건물 아래를 걷던 늦여름 오후에 그녀는 봤다.

어떤 여자가 삼층 베란다 끝에서 빨래를 걷다 실수로 일부를 떨어뜨렸다.

손수건 한 장이 가장 느리게, 마지막으로 떨어졌다.

날개를 반쯤 접은 새처럼, 머뭇머뭇 내려앉을 데를 살피는 혼처럼.

76 페이지 중에서...


━━━ 백목련 ━━━

여러 해 뒤 그 생명-재생-부활의 꽃나무들 아래를 지나다 그녀는 생각했다.

그때 왜 우리는 하필 백목련을 골랐을까.

흰꽃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걸까, 아니면 죽음과?

인도유럽어에서 텅 빔blank, 검음 black과 불꽃flame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는다고 그녀는 읽었다.

어둠을 안고 타오르는 텅 빈 흰 불꽃들 - 그것이 삼월에 짧게 꽃피는 백목련 두 그루인 걸까?

79 페이지 중에서...


━━━ 불빛들 ━━━

겨울이 ㅇ유난히 혹독한 이 도시에서 그녀는 십이월의 밤을 통과하는 중이다.

창밖은 달 없이  어둡다.

......,

그렇다 해도 저 불및들은 여전히 명료한 정적과 고립속에서 하얗게 얼어붙어 있을 것이다.

83 페이지 중에서...


그런 밤에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 바다가 떠오르기도 한다.


━━━ 백발 ━━━

새의 깃털처럼 머리가 하얗게 센 다음에 옛 애인을 만나고 싶다던 중년의 직장 상사를 그녀는 기억한다.

완전히 늙어서......

한 올도 남김없이 머리털이 하얗게 세었을 때.

그때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다면 꼭 그때.

젊음도 육체도 없이.

열망할 시간이 더 남지 않았을 때.

만남 다음으로는 단 하나,

몸을 잃음으로써 완전해질 결별만 남아 있을때.

90 페이지 중에서...


━━━ 구름 ━━━

거대한 흰 구름과 검은 구름 그림자가 빠른 속력으로 먼 하늘과 땅에서 나란히,

함께 흘러 나아갔어.

91 페이지 중에서...


━━━ 백야 ━━━

지금 이 도시에서 그녀가 통과하는 시간은 그렇게 흰 밤일까.

혹은 검은 낮일따?

묵은 고통은 아직 다 오므라들지 않았고 새로운 고통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완전한 빛이나 완전한 어둠이 되지 않은 하루들은 과거의 기억들로 일렁거린다.

반추할 수 없는 건 미래의 기억뿐이다.

무정형의 빛이 그녀의 현재 앞에, 그녀가 모르는 원소들로 가득찬 기체와 같은 무엇으로 어른거리고 있다.

94 페이지 중에서...


━━━ 빛의 섬 ━━━

그녀가 무대에 오른 순가느 강한 조명이 천장에서부터 쏘아져 내려와 그녀를 비췄다.

그러자 무대를 제외한 모든 공간이 검은 바다가 되었아.

......,

그녀는 혼란에 빠졌다.

저 해저 같은 어둠 속으로 더듬더듬 걸어내려갈 것인지,

이 빛의 섬에서 더 버틸 것인지.

95 페이지 중에서...


━━━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

원한이라고 부르기엔 연약하고, 원망이라고 부르기에는 얼마간 독한 마음이었다.

......,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같은 죽음이 그 얼굴 뒤에 끈질기게 어른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버린 적 있는 사람을 무람없이 다시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가 삶을 다시 사랑하는 일은 그때마다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

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97 페이지 중에서...


- [흰 ], 페이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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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둥마리웅 레벨 레벨 회원등급 : 지하계 / Level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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