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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 나무불꽃 중에서
BoOk
그녀는 비에 젖은 도로를 바라보며 서 있다.
마석읍 터미널 건너편의 버스정류장이다.
거대한 화물차들이 굉음을 내며 일차선을 질주해 지나간다.
빗발은 그녀의 우산을 뚫고 들어올 듯 거세다.
......,
축성 정신병원 가지요?
늦은 중년의 버스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올라오라는 손짓을 한다.
차비를 낸 뒤 의자를 찾는 그녀의 눈에 승객들의 얼굴이 들어온다.
모두 그녀를 주시하고 있다.환자인가. 보호자인가? 어디 이상한 구석은 없나,
의심과 경계, 혐오와 호기심이 얽힌 그들의 시선을 그녀는 익숙하게 외면한다.
181 페이지 중에서...
영혜가 사라졌다는 전화를 받은 오후 네시경 그녀는 여섯살 난 아들 지우와 함게 있었다.
지우의 체온이 닷새째 사십도를 맴돌아 폐 사진을 찍으로 간 참이었다.
불안한 듯 촬영실 안의 기사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며 지우는 촬영기 앞에 혼자 서 있었다.
김인혜씨세요?
그런데요.
김영혜씨 보호자 되시죠.
영혜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서 그녀의 휴대폰으로 먼저 연락해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면회시간을 예약하거나, 때로 동생에게 별일이 없는지 묻기 위해 전화를 걸곤 했을 뿐이었다.
간호사는 다급함을 감춘 침착한 말씨로 실종상황을 전했다.
저희가 최선을 다해 찾고 있지만, 혹시 그쪽으로 가면 바로 이리 전화주셔야 합니다.
184 페이지 중에서...
아홉시가 되어가던 참이ㅓㅆ다.
찾으셨다구요.
정말 다행이네요.
면회는 예정대로 다음주에 갈게요.
진심을 담아 감사하다고 인사하긴 했지만, 피로 때문에 그녀의 목소리는 착잡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날 전국적으로 비가 내렸다는 것을,
그러니까 영혜가 발견된 산에도 비가 쏟아지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전화를 끊고 나서였다.
185 페이지 중에서...
빗속의 병사(病舍)들은 고적하다.
짙은 회색의 콘크리트 벽면은 비에 젖은 탓에 평소보다 어둡고 육중해 보인다.
이층과 삼층에 배치된 병실의 창들은 철창살로 막혀있다.
맑은 날에는 그 사이로 얼굴을 내민 환자를 보기 어렵지만,
이런 날씨에는 비를 구경하는 환자들의 회색 얼굴이 여럿 보인다.
영혜의 병실이 있는 별관 건물의 삼층을 어림해 올려다보다가,
그녀는 매점과 면회실로 통하는 원무과 쪽 입구를 걸어들어간다.
박인호 선생님을 뵙기로 했는데요.
196 페이지 중에서...
막을 수 없었을까.
두고두고 그녀는 의문했다.
그날 아버지의 손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칼을 막을 수 없었을까.
남편이 피 흘리는 영혜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간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여예를 제부가 냉정히 버린 것을 말릴 수 없었을까.
그리고 남편이 영혜에게 저지른 일을, 이제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일을,
값싼 추문이 되어버린 그 일을 돌이킬 수 없었을까.
그렇게 모든것이 - 그녀를 둘러산 모든사람의 삶이 모래산처럼 허물어져버린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200 페이지 중에서...
그녀는 계속해서 살아갔다.
등뒤에 끈질긴 추문을 매단 채 가게를 꾸려나갔다.
시간은 가혹할 만큼 공정한 물결이어서,
인내로만 단단히 뭉쳐진 그녀의 삶도 함께 떠밀고 하류로 나아갔다.
그 가을 다섯살이던 지우는 이제 여섯살이 되었고,
환경이 좋고 입원비가 합리적인 이 병원으로 옮길 때쯤 영혜의 상태는 매우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
203 페이지 중에서...
삼십분쯤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성공하면 간호사실에 알려주세요.
아니면 두시에 뵙지요.
그냥 얘기를 끝내기 미안했던지,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 같던 의사는 조금 더 대화를 이글어간다.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신경성 거식증의 경우 십오에서 이십 퍼센트가 기아로 사망합니다.
뼈만 남았어도 본인은 살이 쪘다고 생각하죠.
지배적인 어머니와의 갈등이 주된 심리적 이유가 되고......
하지만 김영혜씨 같은 경우는 정신분열증이면서 식사를 거부하는 특수한 경우예요.
중증의 정신분열증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솔직히 예측 못했ㅅ브니다.
205 페이지 중에서...
수속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영혜에게 말했다.
여긴 공기가 좋아서 입맛이 더 좋아질 거야.
좀 많이 먹고 살이 붙어야지.
그즈음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한 영혜는 창밖의 느티나무에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응......여기엔 큰 나무들이 있네.
209 페이지 중에서...
언니.
영혜의 낡은 검은 스웨터에서 희미한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영혜는 한번 더 언니. 하고 속삭였다.
언니, ......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210 페이지 중에서...
서쪽 복도의 저 자리에서 물구나무서 있는 기괴한 여환자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설마 영혜이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
......영혜야.
대답이 없자 그녀는 좀더 큰 소시로 불렀다.
영혜야. 지금 뭘하고 있어. 똑바로 서봐.
그녀는 영혜의 달아오른 뺨에 손을 뻗었다.
똑바로 서, 영혜야. 머리 안 아파? 얼굴이 새빨갛잖아.
......,
그녀가 탁자에 음을 을 풀어놓으려 하자 영혜는 말했다.
언니, 이제 이런 거 안 가져와도 돼.
영혜는 웃었다.
나, 이제 안 먹어도 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언닌, 알고 있었어?
대답 대신 영혜는 물었다.
......뭘?
난 몰랐거든.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게 됐어.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구, 봐. 저거 봐. 놀랍지 않아?
영혜는 벌떡 일어서서 창을 가리켰다.
모두, 모두 다 물구나무서 있어.
까르륵 .
혜가 웃었다. 그제야 그녀는 영혜의 표정이 어린시절의 어는 순간과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꺼풀 눈이 가늘어지며 온통 까매지는 순간, 영혜의 입에서 까르륵, 무구한 웃음이 터져나오곤 했다.
216 페이지 중에서...
어떻게 내가 알게 됐는지 알아?
꿈에 말이야, 내가 물구나무서 있었는데......
내 봄에서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팔고 들었어.
끝없이, 끝없이......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
열에 들뜬 영혜의 두 눈을 그녀는 우두망찰 건너다보았다.
나, 몸에 물을 맞아야 하는데. 언니, 나 이런 음식 필요없어. 물이 필요한데.
216 페이지 중에서...
언니, 나 여기서 나가게 해줘.
이제 완연히 살히 빠져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얼굴로 영혜는 속삭였다.
길게 말하기 힘든지 자주 말을 끊었고, 가쁜 숨소리가 거칠게 섞여나왔다.
사람들이, 자꾸만 먹으라고 해......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여. 지난번에 먹구선 토했다구......
어젠 먹자마자 잠자는 주사를 놨어.
언니, 나 그 주사 싫어. 정말 싫어......
내보내줘. 나 여기 있기 싫어.
228 페이지 중에서...
네가! 죽을까봐 그러잖아!
영혜는 고개를 돌려, 낯선 여자를 바라보듯 그녀를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이윽고 흘러나온 질문을 마지막으로 영혜는 입을 다물었다.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
229 페이지 중에서...
미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그녀는 다시 한번 집 안의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그것들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거과 꼭 같았다.
242 페이지 중에서...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했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내어 웃기까지 한다.
아마 그도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때,
잊혀졌던 연민이 마치 졸음처럼 쓸쓸히 불러일으켜지기도 한다.
247 페이지 중에서...
......어쩌면 꿈인지 몰라.
그녀는 고개를 수그린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영혜의 귓바퀴에 입을 바싹 대고 한마디씩 말을 있는다.
꿈속에선, 꿈이 전무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그녀는 고개를 든다.
구급차는 축성산을 벗어나는 마지막 굽잇길을 달려나가고 있다.
솔개로 보이는 검은 새가 먹구름장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이 보인다.
쏘는 듯한 여름햇살이 눈을 찔러, 그녀의 시선은 그 날개짓을 더 따라가지 못한다.
- [채식주의자 ], 265 페이지 중에서... -nTalk
그녀는 결국 나무가 되었을까?
나무가 되는 것과, 나무가 될 수 있다는 꿈은 무엇이 다른것일까?
같이 해왔던 수없는 추억과 시간들 사이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을 만들어 냅니다.
가끔 그것이 잊혀지는듯 하지만, 어느 공간 어느 시간을 만나면 다시 또, 나타나 우리를 괴롭히거나
추억에 몸서리치게 하곤 합니다.
어쩌면 그녀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영혜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추억들보다 앞으로 살아가고 싶은 시간들이 더 기다려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축복해 주고, 응원해 주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하는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나와 같이 영원히 그동안의 추억을 곱씹으면서, 웃고 울었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그것이 더이상 의미가 없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꿈이 그녀를 행복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제목: 채식주의자 (한강 소설ㅣ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지은이: 한강
출판사: 창비
출판일: 20220328
ISBN: 9788936434595
그녀는 비에 젖은 도로를 바라보며 서 있다.
마석읍 터미널 건너편의 버스정류장이다.
거대한 화물차들이 굉음을 내며 일차선을 질주해 지나간다.
빗발은 그녀의 우산을 뚫고 들어올 듯 거세다.
......,
축성 정신병원 가지요?
늦은 중년의 버스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올라오라는 손짓을 한다.
차비를 낸 뒤 의자를 찾는 그녀의 눈에 승객들의 얼굴이 들어온다.
모두 그녀를 주시하고 있다.환자인가. 보호자인가? 어디 이상한 구석은 없나,
의심과 경계, 혐오와 호기심이 얽힌 그들의 시선을 그녀는 익숙하게 외면한다.
181 페이지 중에서...
영혜가 사라졌다는 전화를 받은 오후 네시경 그녀는 여섯살 난 아들 지우와 함게 있었다.
지우의 체온이 닷새째 사십도를 맴돌아 폐 사진을 찍으로 간 참이었다.
불안한 듯 촬영실 안의 기사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며 지우는 촬영기 앞에 혼자 서 있었다.
김인혜씨세요?
그런데요.
김영혜씨 보호자 되시죠.
영혜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서 그녀의 휴대폰으로 먼저 연락해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면회시간을 예약하거나, 때로 동생에게 별일이 없는지 묻기 위해 전화를 걸곤 했을 뿐이었다.
간호사는 다급함을 감춘 침착한 말씨로 실종상황을 전했다.
저희가 최선을 다해 찾고 있지만, 혹시 그쪽으로 가면 바로 이리 전화주셔야 합니다.
184 페이지 중에서...
아홉시가 되어가던 참이ㅓㅆ다.
찾으셨다구요.
정말 다행이네요.
면회는 예정대로 다음주에 갈게요.
진심을 담아 감사하다고 인사하긴 했지만, 피로 때문에 그녀의 목소리는 착잡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날 전국적으로 비가 내렸다는 것을,
그러니까 영혜가 발견된 산에도 비가 쏟아지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전화를 끊고 나서였다.
185 페이지 중에서...
빗속의 병사(病舍)들은 고적하다.
짙은 회색의 콘크리트 벽면은 비에 젖은 탓에 평소보다 어둡고 육중해 보인다.
이층과 삼층에 배치된 병실의 창들은 철창살로 막혀있다.
맑은 날에는 그 사이로 얼굴을 내민 환자를 보기 어렵지만,
이런 날씨에는 비를 구경하는 환자들의 회색 얼굴이 여럿 보인다.
영혜의 병실이 있는 별관 건물의 삼층을 어림해 올려다보다가,
그녀는 매점과 면회실로 통하는 원무과 쪽 입구를 걸어들어간다.
박인호 선생님을 뵙기로 했는데요.
196 페이지 중에서...
막을 수 없었을까.
두고두고 그녀는 의문했다.
그날 아버지의 손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칼을 막을 수 없었을까.
남편이 피 흘리는 영혜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간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여예를 제부가 냉정히 버린 것을 말릴 수 없었을까.
그리고 남편이 영혜에게 저지른 일을, 이제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일을,
값싼 추문이 되어버린 그 일을 돌이킬 수 없었을까.
그렇게 모든것이 - 그녀를 둘러산 모든사람의 삶이 모래산처럼 허물어져버린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200 페이지 중에서...
그녀는 계속해서 살아갔다.
등뒤에 끈질긴 추문을 매단 채 가게를 꾸려나갔다.
시간은 가혹할 만큼 공정한 물결이어서,
인내로만 단단히 뭉쳐진 그녀의 삶도 함께 떠밀고 하류로 나아갔다.
그 가을 다섯살이던 지우는 이제 여섯살이 되었고,
환경이 좋고 입원비가 합리적인 이 병원으로 옮길 때쯤 영혜의 상태는 매우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
203 페이지 중에서...
삼십분쯤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성공하면 간호사실에 알려주세요.
아니면 두시에 뵙지요.
그냥 얘기를 끝내기 미안했던지,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 같던 의사는 조금 더 대화를 이글어간다.
지난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신경성 거식증의 경우 십오에서 이십 퍼센트가 기아로 사망합니다.
뼈만 남았어도 본인은 살이 쪘다고 생각하죠.
지배적인 어머니와의 갈등이 주된 심리적 이유가 되고......
하지만 김영혜씨 같은 경우는 정신분열증이면서 식사를 거부하는 특수한 경우예요.
중증의 정신분열증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이렇게 될 줄은 솔직히 예측 못했ㅅ브니다.
205 페이지 중에서...
수속을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영혜에게 말했다.
여긴 공기가 좋아서 입맛이 더 좋아질 거야.
좀 많이 먹고 살이 붙어야지.
그즈음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한 영혜는 창밖의 느티나무에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응......여기엔 큰 나무들이 있네.
209 페이지 중에서...
언니.
영혜의 낡은 검은 스웨터에서 희미한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영혜는 한번 더 언니. 하고 속삭였다.
언니, ......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210 페이지 중에서...
서쪽 복도의 저 자리에서 물구나무서 있는 기괴한 여환자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설마 영혜이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
......영혜야.
대답이 없자 그녀는 좀더 큰 소시로 불렀다.
영혜야. 지금 뭘하고 있어. 똑바로 서봐.
그녀는 영혜의 달아오른 뺨에 손을 뻗었다.
똑바로 서, 영혜야. 머리 안 아파? 얼굴이 새빨갛잖아.
......,
그녀가 탁자에 음을 을 풀어놓으려 하자 영혜는 말했다.
언니, 이제 이런 거 안 가져와도 돼.
영혜는 웃었다.
나, 이제 안 먹어도 돼.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언닌, 알고 있었어?
대답 대신 영혜는 물었다.
......뭘?
난 몰랐거든.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제야 알게 됐어.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구, 봐. 저거 봐. 놀랍지 않아?
영혜는 벌떡 일어서서 창을 가리켰다.
모두, 모두 다 물구나무서 있어.
까르륵 .
혜가 웃었다. 그제야 그녀는 영혜의 표정이 어린시절의 어는 순간과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꺼풀 눈이 가늘어지며 온통 까매지는 순간, 영혜의 입에서 까르륵, 무구한 웃음이 터져나오곤 했다.
216 페이지 중에서...
어떻게 내가 알게 됐는지 알아?
꿈에 말이야, 내가 물구나무서 있었는데......
내 봄에서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팔고 들었어.
끝없이, 끝없이......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활짝 벌렸는데......
열에 들뜬 영혜의 두 눈을 그녀는 우두망찰 건너다보았다.
나, 몸에 물을 맞아야 하는데. 언니, 나 이런 음식 필요없어. 물이 필요한데.
216 페이지 중에서...
언니, 나 여기서 나가게 해줘.
이제 완연히 살히 빠져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얼굴로 영혜는 속삭였다.
길게 말하기 힘든지 자주 말을 끊었고, 가쁜 숨소리가 거칠게 섞여나왔다.
사람들이, 자꾸만 먹으라고 해......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여. 지난번에 먹구선 토했다구......
어젠 먹자마자 잠자는 주사를 놨어.
언니, 나 그 주사 싫어. 정말 싫어......
내보내줘. 나 여기 있기 싫어.
228 페이지 중에서...
네가! 죽을까봐 그러잖아!
영혜는 고개를 돌려, 낯선 여자를 바라보듯 그녀를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이윽고 흘러나온 질문을 마지막으로 영혜는 입을 다물었다.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
229 페이지 중에서...
미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더이상은 견딜 수 없다.
더 앞으로 갈 수 없다.
가고 싶지 않다.
그녀는 다시 한번 집 안의 물건들을 둘러보았다.
그것들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던 거과 꼭 같았다.
242 페이지 중에서...
산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그 웃음의 끝에 그녀는 생각했다.
어떤 일이 지나간 뒤에라도, 그토록 끔찍한 일들을 겪은 뒤에도 사람은 먹고 마시고,
용변을 보고, 몸을 씻고 살아간다.
때로는 소리내어 웃기까지 한다.
아마 그도 지금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때,
잊혀졌던 연민이 마치 졸음처럼 쓸쓸히 불러일으켜지기도 한다.
247 페이지 중에서...
......어쩌면 꿈인지 몰라.
그녀는 고개를 수그린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영혜의 귓바퀴에 입을 바싹 대고 한마디씩 말을 있는다.
꿈속에선, 꿈이 전무인 것 같잖아.
하지만 깨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란 걸 알지......
그러니까, 언젠가 우리가 깨어나면, 그때는......
그녀는 고개를 든다.
구급차는 축성산을 벗어나는 마지막 굽잇길을 달려나가고 있다.
솔개로 보이는 검은 새가 먹구름장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이 보인다.
쏘는 듯한 여름햇살이 눈을 찔러, 그녀의 시선은 그 날개짓을 더 따라가지 못한다.
- [채식주의자 ], 265 페이지 중에서... -최신글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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