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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
BoOk
몇 년 전 대설주의보가 내렸을 때였다.
눈보라가 치는 서울의 언덕길을 그녀는 혼자서 걸어올라가고 있었다.
우산을 썻지만 소용없었다.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얼굴로, 몸으로, 세차게 휘몰아치는 눈송이들을 거슬러 그녀는 계속 걸었다.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일까. 이 차갑고 적대적인 것은?
동시에연약한 것, 사라지는 것,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것은?
64 페이지 중에서...
후미진 주택가 건물 아래를 걷던 늦여름 오후에 그녀는 봤다.
어떤 여자가 삼층 베란다 끝에서 빨래를 걷다 실수로 일부를 떨어뜨렸다.
손수건 한 장이 가장 느리게, 마지막으로 떨어졌다.
날개를 반쯤 접은 새처럼, 머뭇머뭇 내려앉을 데를 살피는 혼처럼.
76 페이지 중에서...
여러 해 뒤 그 생명-재생-부활의 꽃나무들 아래를 지나다 그녀는 생각했다.
그때 왜 우리는 하필 백목련을 골랐을까.
흰꽃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걸까, 아니면 죽음과?
인도유럽어에서 텅 빔blank, 검음 black과 불꽃flame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는다고 그녀는 읽었다.
어둠을 안고 타오르는 텅 빈 흰 불꽃들 - 그것이 삼월에 짧게 꽃피는 백목련 두 그루인 걸까?
79 페이지 중에서...
겨울이 ㅇ유난히 혹독한 이 도시에서 그녀는 십이월의 밤을 통과하는 중이다.
창밖은 달 없이 어둡다.
......,
그렇다 해도 저 불및들은 여전히 명료한 정적과 고립속에서 하얗게 얼어붙어 있을 것이다.
83 페이지 중에서...
그런 밤에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 바다가 떠오르기도 한다.
새의 깃털처럼 머리가 하얗게 센 다음에 옛 애인을 만나고 싶다던 중년의 직장 상사를 그녀는 기억한다.
완전히 늙어서......
한 올도 남김없이 머리털이 하얗게 세었을 때.
그때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다면 꼭 그때.
젊음도 육체도 없이.
열망할 시간이 더 남지 않았을 때.
만남 다음으로는 단 하나,
몸을 잃음으로써 완전해질 결별만 남아 있을때.
90 페이지 중에서...
거대한 흰 구름과 검은 구름 그림자가 빠른 속력으로 먼 하늘과 땅에서 나란히,
함께 흘러 나아갔어.
91 페이지 중에서...
지금 이 도시에서 그녀가 통과하는 시간은 그렇게 흰 밤일까.
혹은 검은 낮일따?
묵은 고통은 아직 다 오므라들지 않았고 새로운 고통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완전한 빛이나 완전한 어둠이 되지 않은 하루들은 과거의 기억들로 일렁거린다.
반추할 수 없는 건 미래의 기억뿐이다.
무정형의 빛이 그녀의 현재 앞에, 그녀가 모르는 원소들로 가득찬 기체와 같은 무엇으로 어른거리고 있다.
94 페이지 중에서...
그녀가 무대에 오른 순가느 강한 조명이 천장에서부터 쏘아져 내려와 그녀를 비췄다.
그러자 무대를 제외한 모든 공간이 검은 바다가 되었아.
......,
그녀는 혼란에 빠졌다.
저 해저 같은 어둠 속으로 더듬더듬 걸어내려갈 것인지,
이 빛의 섬에서 더 버틸 것인지.
95 페이지 중에서...
원한이라고 부르기엔 연약하고, 원망이라고 부르기에는 얼마간 독한 마음이었다.
......,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같은 죽음이 그 얼굴 뒤에 끈질기게 어른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버린 적 있는 사람을 무람없이 다시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가 삶을 다시 사랑하는 일은 그때마다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
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97 페이지 중에서...
nTalk
새의 깃털처럼 머리가 하얗게 센 다음에 옛 애인을 만나고 싶다던 중년의 직장 상사를 그녀는 기억한다.
완전히 늙어서......
한 올도 남김없이 머리털이 하얗게 세었을 때.
그때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다면 꼭 그때.
젊음도 육체도 없이.
열망할 시간이 더 남지 않았을 때.
만남 다음으로는 단 하나,
몸을 잃음으로써 완전해질 결별만 남아 있을때.
90 페이지 중에서...
왜 모든 기운이 사라진 그때 만나고 싶은 걸까?
어쩌면 진정으로 사랑을 했는지 의심했을 것 같다.
맞다! 우리는 항상 누군가를 그리워 하면서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의심한다.
아니 어쩌면 의심이 아니라, 자신을 너무 잘 알기에 내리는 정확하고 이성적인 판단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난 확인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확인해서, 진정으로 사랑을 하고 있다한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것은 아니니까.
제목: 흰 (한강 소설ㅣ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지은이: 한강
출판사: 문학동네
출판일: 20180425
ISBN: 9788954651134
몇 년 전 대설주의보가 내렸을 때였다.
눈보라가 치는 서울의 언덕길을 그녀는 혼자서 걸어올라가고 있었다.
우산을 썻지만 소용없었다.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얼굴로, 몸으로, 세차게 휘몰아치는 눈송이들을 거슬러 그녀는 계속 걸었다.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일까. 이 차갑고 적대적인 것은?
동시에연약한 것, 사라지는 것,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것은?
64 페이지 중에서...
후미진 주택가 건물 아래를 걷던 늦여름 오후에 그녀는 봤다.
어떤 여자가 삼층 베란다 끝에서 빨래를 걷다 실수로 일부를 떨어뜨렸다.
손수건 한 장이 가장 느리게, 마지막으로 떨어졌다.
날개를 반쯤 접은 새처럼, 머뭇머뭇 내려앉을 데를 살피는 혼처럼.
76 페이지 중에서...
여러 해 뒤 그 생명-재생-부활의 꽃나무들 아래를 지나다 그녀는 생각했다.
그때 왜 우리는 하필 백목련을 골랐을까.
흰꽃은 생명과 연결되어 있는 걸까, 아니면 죽음과?
인도유럽어에서 텅 빔blank, 검음 black과 불꽃flame이 모두 같은 어원을 갖는다고 그녀는 읽었다.
어둠을 안고 타오르는 텅 빈 흰 불꽃들 - 그것이 삼월에 짧게 꽃피는 백목련 두 그루인 걸까?
79 페이지 중에서...
겨울이 ㅇ유난히 혹독한 이 도시에서 그녀는 십이월의 밤을 통과하는 중이다.
창밖은 달 없이 어둡다.
......,
그렇다 해도 저 불및들은 여전히 명료한 정적과 고립속에서 하얗게 얼어붙어 있을 것이다.
83 페이지 중에서...
그런 밤에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 바다가 떠오르기도 한다.
새의 깃털처럼 머리가 하얗게 센 다음에 옛 애인을 만나고 싶다던 중년의 직장 상사를 그녀는 기억한다.
완전히 늙어서......
한 올도 남김없이 머리털이 하얗게 세었을 때.
그때 꼭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다면 꼭 그때.
젊음도 육체도 없이.
열망할 시간이 더 남지 않았을 때.
만남 다음으로는 단 하나,
몸을 잃음으로써 완전해질 결별만 남아 있을때.
90 페이지 중에서...
거대한 흰 구름과 검은 구름 그림자가 빠른 속력으로 먼 하늘과 땅에서 나란히,
함께 흘러 나아갔어.
91 페이지 중에서...
지금 이 도시에서 그녀가 통과하는 시간은 그렇게 흰 밤일까.
혹은 검은 낮일따?
묵은 고통은 아직 다 오므라들지 않았고 새로운 고통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다.
완전한 빛이나 완전한 어둠이 되지 않은 하루들은 과거의 기억들로 일렁거린다.
반추할 수 없는 건 미래의 기억뿐이다.
무정형의 빛이 그녀의 현재 앞에, 그녀가 모르는 원소들로 가득찬 기체와 같은 무엇으로 어른거리고 있다.
94 페이지 중에서...
그녀가 무대에 오른 순가느 강한 조명이 천장에서부터 쏘아져 내려와 그녀를 비췄다.
그러자 무대를 제외한 모든 공간이 검은 바다가 되었아.
......,
그녀는 혼란에 빠졌다.
저 해저 같은 어둠 속으로 더듬더듬 걸어내려갈 것인지,
이 빛의 섬에서 더 버틸 것인지.
95 페이지 중에서...
원한이라고 부르기엔 연약하고, 원망이라고 부르기에는 얼마간 독한 마음이었다.
......,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같은 죽음이 그 얼굴 뒤에 끈질기게 어른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버린 적 있는 사람을 무람없이 다시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가 삶을 다시 사랑하는 일은 그때마다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
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97 페이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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